신발장을 열어보면 참 다양한 신발이 있다.
운동화, 로퍼, 부츠, 샌들, 하이힐. 계절에 따라 신는 신발도 다르고, 옷에 따라 고르는 신발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중에는 수백 년 전 사람들이 신던 것과 놀라울 만큼 비슷한 디자인이 많다.
하이힐은 원래 남자들이 신었고, 로퍼의 역사에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이 등장한다. 여름마다 꺼내 신는 에스파드리유는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신발이다.
지난 글에서는 인류가 언제부터 신발을 신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신발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봤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옛날 신발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신발을 신는 동안 사람의 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 하이힐은 원래 남자의 신발이었다
지금 하이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여성용 구두가 떠오른다.
그런데 하이힐의 역사에는 남자들이 먼저 등장한다.
페르시아의 기병들은 말을 탈 때 굽이 있는 신발을 신었다. 발을 등자에 안정적으로 걸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키를 커 보이게 하거나 다리를 길어 보이게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신발의 굽은 원래 기능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페르시아의 문화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굽이 있는 신발도 유럽 상류층의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굽이 높은 신발을 즐겨 신었던 왕으로 유명하다. 1701년에 그려진 초상화에서도 왕은 빨간 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다.
특히 붉은색 굽은 궁정의 권위와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1670년대 초, 루이 14세는 빨간 굽을 왕이 허락한 몇몇 귀족만 신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말을 타기 위해 만들어진 굽이 어느 순간 권력과 부를 보여주는 장식이 된 것이다.
이후 남성복이 점차 실용적인 방향으로 바뀌면서 높은 굽은 남성 패션에서 줄어들었다. 반면 여성 패션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오늘날의 하이힐이 페르시아 승마화에서 그대로 이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굽이 가진 기능이 패션의 요소로 바뀌어 간 역사는 분명 흥미롭다.
지금도 카우보이 부츠를 보면 뒤꿈치에 굽이 있다. 이 굽 역시 승마와 깊은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 디자인.
신발의 역사는 이런 변화로 가득하다.

2. 높을수록 특별했던 신발, 쇼핀
16세기 베네치아에는 조금 특이한 신발이 있었다.
바로 쇼핀(Chopine)이다.
쇼핀은 신발 바닥을 높게 만든 일종의 플랫폼 신발이었다. 나무나 코르크 등으로 만든 높은 밑창 위에 발을 올려놓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길거리의 진흙이나 오물로부터 발과 옷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점차 높은 신발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일부 쇼핀은 높이가 수십 센티미터에 달했다.
그렇게 높은 신발을 신고 어떻게 걸었을까?
실제로 높은 쇼핀을 신은 여성들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플랫폼 슈즈를 보면 이 쇼핀이 떠오른다.
1993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에서는 모델 나오미 캠벨이 매우 높은 플랫폼 슈즈를 신고 걷다가 넘어지는 장면이 유명해졌다.
당시 신었던 신발은 높이가 약 28cm에 달하는 플랫폼 슈즈였다. 이 디자인은 현재 영국 V&A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물론 현대 플랫폼 슈즈가 쇼핀에서 직접 발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발의 높이로 몸의 비율을 바꾸고, 평범한 신발을 특별한 패션으로 만드는 생각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수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신발을 이용해 자신을 더 크고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3. 발보다 유행이 먼저였던 시대, 뾰족코 신발
중세 유럽에는 앞코가 유난히 긴 신발이 있었다.
풀렌(Poulaine)이라고 불리는 신발이다.
14~15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앞코가 길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이 특징이었다.
일부 신발은 발보다 앞코가 훨씬 길었다.
발가락이 실제로 그 끝까지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길게 뻗은 부분은 신발의 모양을 강조하기 위한 장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신발의 유행이 사람의 발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2021년 영국 케임브리지 지역의 중세 유골 177구를 조사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연구진은 1113세기 유골에서는 무지외반증의 흔적이 약 6%였지만, 뾰족한 신발이 유행한 1415세기 유골에서는 약 27%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무지외반증은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휘면서 뿌리 쪽 뼈가 튀어나오는 증상이다. 좁고 뾰족한 신발이 발가락을 오랫동안 한쪽으로 몰아넣으면서 생길 수 있다.
물론 신발 하나만이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행이 발의 모양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지금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지금도 앞코가 뾰족한 구두는 계절마다 다시 유행한다. 600년 전 풀렌보다는 훨씬 짧아졌지만, 발보다 모양이 먼저인 디자인은 여전히 사랑받는다.

4. 노르웨이 어부의 신발이 로퍼가 되기까지
끈 없이 쏙 신는 로퍼는 지금 가장 익숙한 구두 중 하나다.
로퍼의 이야기에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아울란이 등장한다. 추운 부두에서 일하던 어부들은 젖고 얼어붙는 신발 끈 대신, 끈 없이 신는 가죽신을 신었다.
이 지역의 구두 장인 닐스 그레고리우손 트베랑에르는 이 신발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카신을 함께 참고해, 1930년 무렵 끈 없는 '아울란 모카신'을 만들었다. 발등에는 장식용 가죽 띠를 덧대고 작은 구멍을 냈다.
1936년, 미국의 신발 회사 G.H.배스는 이 신발을 다듬어 '위준(Weejun)'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노르웨이 사람을 뜻하는 영어 '노르웨지안'에서 따온 이름이다.
1950년대에는 미국 대학생들이 발등 띠의 구멍에 동전을 끼워 신기 시작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바로 '페니 로퍼'다.
언 부두에서 일하던 어부의 신발이 대학생의 교복 같은 신발이 되고, 지금은 출근길 구두가 되었다.
5. 수백 년을 건너온 여름 신발, 에스파드리유와 조리
여름이면 꺼내 신는 신발 중에도 오래된 디자인이 많다.
에스파드리유는 풀을 꼬아 만든 밧줄로 밑창을 만들고, 그 위에 천을 덧댄 신발이다. 스페인 등 이베리아반도에서 신었고, 유럽에는 적어도 1322년부터 기록이 남아 있다.
1970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스페인의 에스파드리유 공방 카스타네르와 함께 굽이 있는 웨지 에스파드리유를 만들었다. 농부와 어부의 신발이 파리의 패션이 된 순간이었다.
엄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우는 조리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일본의 전통 신발 조리에서 영감을 받아, 1952년 일본 고베의 고무 회사가 미국 디자이너와 함께 고무 조리를 만들었다. 1956년에는 하와이에서 한 달에 약 10만 켤레가 팔렸다고 한다.
나무와 짚으로 만들던 신발이 고무로 바뀌었을 뿐, 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우는 모양은 그대로다.
6. 신발을 신는 동안 사람의 발은 어떻게 변했을까
사람이 신발을 신기 시작한 것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신발보다 훨씬 이전으로 보인다.
인류학자 에릭 트링카우스는 약 4만 년 전 사람들의 뼈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다리뼈는 여전히 튼튼한데, 발가락뼈만 눈에 띄게 가늘어진 것이다. 그는 신발이 발가락이 받던 힘을 대신 받아 주면서 생긴 변화로 보았다. 다만 활동량이 줄어든 결과라는 반론도 있다.
반대로 평생 맨발로 지낸 사람들의 발도 연구되었다. 2009년 벨기에와 영국 연구진은 인도에서 평생 맨발로 걸어온 사람들과 신발을 신는 사람들의 발을 비교했다. 맨발로 지낸 사람들은 앞발의 폭이 더 넓었고, 걸을 때 발바닥에 실리는 힘이 고르게 퍼졌다.
요즘 발가락이 하나씩 들어가는 신발이나 바닥이 얇은 맨발 러닝화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신발이 발을 보호해 주는 동안, 우리 발은 조금씩 신발의 모양을 닮아 갔는지도 모른다.
7. 디자이너의 시선, 살아남은 디자인의 공통점
옛날 신발을 하나씩 따라가 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오래 살아남은 디자인은 대부분 처음에 이유가 있었다. 말을 타기 위한 굽, 진흙을 피하기 위한 높은 밑창, 언 부두에서 신기 편한 끈 없는 가죽신, 더운 날 시원한 밧줄 밑창.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는 사라지고 모양만 남았다. 우리는 말을 타지 않아도 굽을 신고, 진흙길을 걷지 않아도 플랫폼을 신는다. 기능이 아름다움이 되고, 아름다움이 다시 유행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풀렌의 이야기처럼, 모양이 발보다 앞설 때는 몸이 그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좋은 신발 디자인은 결국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인 것 같다. 보기 좋으면서도 발을 존중하는 신발.
오늘 신발장을 열면, 내 신발 중 어떤 것이 몇백 년 전 누군가의 신발에서 왔는지 한번 찾아봐도 재미있겠다.
출처
- Popular Science, High heels were once the height of men's fashion: https://www.popsci.com/technology/high-heel-history/
- Getty Museum (Iris), Louis XIV and his red heels: https://blogs.getty.edu/iris/?p=23772
- FIT Fashion History, Chopines: https://fashionhistory.fitnyc.edu/chopines/
- Victoria and Albert Museum, Super Elevated Gillie, Vivienne Westwood (1993): https://collections.vam.ac.uk/item/O85360/super-elevated-gillie-pair-of-platform-vivienne-westwood
- ScienceDaily, Medieval pointy shoes and bunions (2021): https://www.sciencedaily.com/releases/2021/06/210611085617.htm
- Gentleman's Gazette, How a Norwegian fisherman invented the penny loafer: https://www.gentlemansgazette.com/penny-loafer-history/
- Wikipedia, Espadrille: https://en.wikipedia.org/wiki/Espadrille
- Nippon.com, The flip-flop as traditional Japanese design: https://www.nippon.com/en/japan-topics/g02626/
- Live Science, First shoes worn 40,000 years ago: https://www.livescience.com/4964-shoes-worn-40-000-years.html
- ScienceDaily, Barefoot walkers' foot shape (2009): https://sciencedaily.com/releases/2009/07/09072409133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