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 옷장에서 꺼내는 코트가 있다. 트렌치코트다. 베이지색 긴 코트에 허리 벨트를 묶으면 그것만으로 계절이 완성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트렌치코트를 자세히 보면 이상한 디테일이 꽤 많다. 어깨에 달린 작은 띠, 한쪽 가슴에만 붙은 덧천, 손목의 스트랩, 벨트에 달린 D자 고리. 장식처럼 보이는 이 디테일들은 사실 모두 쓰임이 있었다.
지난 글에서 무스탕과 어그부츠가 필요에서 시작해 패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트렌치코트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진흙투성이 참호에서 시작된 코트 이야기다.
1. 비를 막는 원단에서 시작되다
트렌치코트의 이야기는 원단에서 시작된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비를 막기 위해 고무를 입힌 코트를 입었다. 물은 막았지만 무겁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땀이 차고, 고무 냄새도 심했다.
1879년, 영국의 토머스 버버리는 '개버딘'이라는 원단을 만들었다. 실을 짜기 전에 방수 처리를 하고 아주 촘촘하게 짠 원단이다. 비는 튕겨 내면서도 공기는 통했다. 무겁고 답답한 고무 코트를 대신할 수 있는 원단이었다.
그보다 앞서 1850년대부터 아쿠아스큐텀도 방수 코트를 만들고 있었다. 이름부터 라틴어로 '물을 막는 방패'라는 뜻이다. 두 회사는 지금도 서로 트렌치코트를 처음 만들었다고 말한다. 누가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 참호에서 입던 코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땅을 길게 파서 만든 참호 속에서 몇 달씩 싸웠다. 비가 오면 참호는 진흙탕이 되었다.
당시 군인들이 입던 외투는 길고 무거운 모직 코트였다. 비에 젖으면 더 무거워졌고, 긴 밑단은 진흙을 잔뜩 묻혔다.
장교들은 대신 무릎 길이의 가볍고 방수가 되는 코트를 입었다. 참호에서 입는다고 해서 이름도 '트렌치(참호) 코트'가 되었다. 트렌치코트는 장교가 자기 돈으로 사서 입는 옷이었고, 일반 병사는 입을 수 없었다.
3. 디테일마다 이유가 있었다
트렌치코트의 디테일은 하나하나가 참호에서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였다.
- 어깨 견장: 계급장을 다는 자리였다.
- 허리 벨트와 D자 고리: 지도 가방이나 칼 같은 장비를 걸었다. 수류탄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 어깨의 덧천(건 플랩): 한쪽 어깨와 가슴을 한 겹 더 덮는 천이다.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 주었다.
- 등의 덧천: 등 위쪽에 천을 한 겹 더 달아 빗물이 흘러내리게 했다.
- 손목 스트랩: 손목을 조여, 비 오는 날 쌍안경을 들어도 빗물이 팔을 타고 소매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했다.
- 래글런 소매: 어깨선 없이 목에서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소매라 팔을 움직이기 편했다.
- 깃의 단추: 목을 꽁꽁 여며 비바람을 막았다.
- 무릎 길이 밑단: 진흙에 끌리지 않으면서 다리를 덮었다.
지금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트렌치코트의 모양은 이렇게 참호에서 완성되었다.

4. 전쟁이 끝나고, 영화 속으로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장교들은 트렌치코트를 버리지 않았다. 계속 입었다. 전쟁을 겪고 돌아온 사람들의 코트라는 이미지 덕분에, 트렌치코트는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가진 옷이 되었다.
이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곳은 영화였다.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트렌치코트는 형사와 스파이, 그리고 홀로 걷는 남자의 옷이 되었다.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마지막 장면, 안개 낀 공항의 트렌치코트는 지금도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그리고 트렌치코트는 여성의 옷장에도 들어왔다. 허리를 묶어 실루엣을 잡는 트렌치코트는 남성의 옷이었던 만큼 단정하고, 동시에 여성스러운 분위기도 낼 수 있었다.
5. 요즘은 트렌치코트를 잘 안 입는다?
솔직히 요즘 긴 트렌치코트를 입는 날은 많지 않다. 나도 그렇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정통 트렌치코트는 멋있지만, 매일 입기에는 조금 차려입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트렌치코트도 바뀌었다. 먼저 길이가 짧아졌다. 종아리까지 오던 코트가 허리나 엉덩이 길이의 트렌치 재킷이 되었다. 짧아지니 청바지나 카고 바지에도 편하게 어울린다.
입는 방법도 달라졌다. 몸에 꼭 맞게 입는 대신 넉넉하게 걸치고, 벨트는 버클로 채우는 대신 느슨하게 묶는다. 구두 대신 운동화나 로퍼를 신는다. 단정한 코트가 아니라 편하게 걸치는 겉옷이 된 것이다.
트렌치코트가 맡던 자리를 다른 옷이 가져가기도 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아우터 중 하나인 반 재킷은 원래 농장에서 일할 때 입던 짧은 작업복이다. 밀리터리 재킷도 다시 유행이다. 일하던 옷이 패션이 되었다는 점에서, 트렌치코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옷들이다.
그래도 트렌치코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견장, 벨트, 덧천, 손목 스트랩 같은 디테일은 짧은 재킷에도, 케이프에도, 원피스에도 옮겨 가 여전히 살아 있다. 모양은 캐주얼해졌지만, 100년 전 참호에서 생긴 디테일이 여전히 이 옷의 얼굴이다.

6. 디자이너의 시선
트렌치코트는 디자이너에게 꽤 어려운 옷이다. 이미 완성된 모양이 너무 유명해서, 조금만 바꿔도 트렌치코트처럼 보이지 않고, 너무 안 바꾸면 새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트렌치코트를 디자인할 때는 디테일 하나하나를 '왜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깨에 계급장을 달지 않고, 벨트에 지도 가방을 걸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디테일을 남길지, 줄일지, 다른 쓰임으로 바꿀지 고민하게 된다.
무스탕과 어그부츠처럼, 트렌치코트도 처음부터 멋을 내려고 만든 옷이 아니었다. 비를 막고, 진흙을 피하고, 장비를 걸기 위해 붙인 디테일들이 쌓여서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기능에서 시작한 디자인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걸, 트렌치코트만큼 잘 보여 주는 옷도 드물다.
올가을 트렌치코트의 벨트를 묶을 때, 한 번쯤 그 D자 고리와 어깨의 작은 띠가 어디에서 왔는지 떠올려 보면 좋겠다.

출처
- Wikipedia, Trench coat: https://en.wikipedia.org/wiki/Trench_coat
- War History Online, A History of the Trench Coat: https://www.warhistoryonline.com/instant-articles/history-of-the-trench-coat.html
- W Korea, 확 짧아진 트렌치 코트 길이: https://www.wkorea.com/?p=354912
- Vogue Korea, 지루할 틈 없는 트렌치 코트: https://www.vogue.co.kr/2025/09/25/%ec%a7%80%eb%a3%a8%ed%95%a0-%ed%8b%88-%ec%97%86%eb%8a%94-%ed%8a%b8%eb%a0%8c%ec%b9%98-%ec%bd%94%ed%8a%b8/
- W Magazine, Fall Jacket Trends: https://www.wmagazine.com/fashion/fall-jacket-trends